남바원 경기도 여주 여행기 1탄
명성왕후 생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6호) 입니다.
명성황후는 1851년(철종2) 음력 9월25일 여주군 근동면 섬락리 지금의 여주시 명성로71(능현동)에서 태어났다.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는 인현왕후의 아버지였던 민유중의 5대손이었다.
민치록 일가가 언제까지 여주에서 살았는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민치록이 1858년(철종9) 9월에 사망하였으므로 명성황후가 7~8세까지 능현리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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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어린시절 정보는 명성왕후생가 홈페이지 링크를 통해서 확인하시면 자세히 보실 수 있습니다. 확안하세요.!!
명성황후 생가 방문 하실분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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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가기전 홈페이지를 통해서 정보를 얻고 갔으면 더욱 좋은 여행이 되었을것 같은데 아쉽네요.
그럼 가볼까요.
명성황후생가 입구 우측에 보시면 하마비[(下馬碑 )가 보입니다.
탄흔으로 인해 비신의 일부가 깨졌고, 글씨도 훼손된 상태입니다.
하마비[(下馬碑 ) - 그 앞을 지날 때에는 신분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석비(石碑).
하늘을 봤는데 구름이 깃털모양입니다.
명성황후 추모비
명성황후 기념관
명성황후 생가 맞은편에 위치한 기념관
명성황후와 고종의 영정등을 비롯한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명성황후 순국승모비
명성황후 생가(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6호)
명성황후가 출생하여 8세까지 살았던 집이다.
원래 조선 숙종13연(1687)에 숙종의 장인이며,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막으로 건립 되었는데 당시 건물로서 남아있는 것은 안채뿐이었으나
1975, 1976년에 안채를 각가 중수하였고, 1996년에는 행랑채와 사랑채, 초당등을 복원하여 면모를 일신 하였다.
안채는 14칸 규모의 민도리집 인데, 8칸 규모의 팔각지붕 본채 한쪽에 6칸 규모의 맞배지붕 날개채가 붙어 ㄱ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본채는 전면에 퇴간이 있는 5량 구조인데 안방(2칸) 대청(4칸), 건넌방(1칸 반), 부엌(2칸)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고,
날개채는 3량 구조로 안방 안쪽에서 꺽여 온돌방(1칸 반)과 부엌(3칸), 광(1칸 반)이 위치하고 있다.
이 집은 재목은 그리 크지 않고 간실도 넓지 않으나 부재의 형태와 결구법 등에서 조선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출처 - 명성황후 생가 홈페이지(http://www.empressmyeongseong.kr/)
명성황후 생가로 들어가는 솟을 대문. 솟을대문 좌추측의 방들은 아랫사람들의 처소이다.
민유중(1630~1687) 신도비
감고당
명성황후생가 연못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인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천인공노할 음로를 세운다.
일명 "여우사냥"으로 불린 명성황후 시해시도였다.
1898년 음력 8월20일 새벽. 경복궁안 건청궁의 옥호루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지휘하는 일본 낭인들의 손에 처참하게 시해 당한다.
시신마저 향원정의 녹원에서 불살라지는 수모를 당했다.
바로 을미사변 이다.
일본은 일본 낭인들이 개입한 사건이라 주장했지만 2005년 일본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가
을미사변 사건 두 달뒤에 작성한 일본천황이 결재한 보고서가 공개되었다.
2005년 명성황후 시해범의 후손인 가와노 다쓰미씨와 이에이리 게이코씨가 한국을 찾았다.
두 사람은 명성황후의 무덤에 절을 하면서 조부 대신 용서를 구했다.
이 기사를 보고 독일 빌리 브란트 총리가 떠올랐습니다.
1970년 12월 7일 유대인학살 기념비에서 사죄하는 빌리 브란트
참 지금의 일본과 많이 비교가 됩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4대 총리 골다 메이어
우리는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는 않을 것이다.
19세기 말 한국을 다녀간 영국의 비숍 여사는 명성황후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명성황후는 갸날프고 미인이었다, 눈은 차고 날카로워 단번에 지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수있었다.
명석하고 야심적이며 책략에도 능할뿐아니라 매후 매혹적이고 여러가지 면에서 매우 사랑스런 여인이었다"
선교사 언더우드 부인은 명성황후에 대해..
그 녀의 지식은 주로 중국에서 얻은 것이었지만 세계 강대국과 그 정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고 자기가 들은 것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섬세한 감각을 가진 유능한 외교관이었고 반대세력의 허를 찌르는 데 능했다. ... 그녀는 일본을 반대했고 애국적이었으며 조선의 이익을 위해 몸을 바치고 있었다. ... 그녀는 아시아의 그 어떤 왕후보다도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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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황현 매천야록中
대원군이 10년간 쌓은 국부를 순식간에 탕진한 여자.
서유견문의 저자 유길준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왕비는 세계 역사상 가장 나쁜 여자입니다. 그녀는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보다 더 나쁩니다.
여행기를 작성하면서 포털에 명성황후에 대한 뉴스.기사를 확인하고 댓글을 보면 리플로 논쟁이 아주 심합니다.
명석하고 노려한 외교가와 나라를 망치게한 인물로 극과 극의 평가를 받고 있는 명성황후
저는 이러한 논쟁에 관심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이런 평가를 받고 있는 명성황후가 누구인지 어떻게 시해가 되었는지 역사적으로 알아야 할것 같습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채호 선생님 말씀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남바원여행기 - 홍유릉편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잠들어 계신곳)
명성황후생가 홈페이지 - http://www.empressmyeongseon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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