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타고 한강으로 갈 때면 항상지나던 다리가 있다.
왕십리와 뚝섬 사이, 중랑천을 가로지르는 돌다리 항상 그곳에 있었고 왜 그곳에 있었는지 생각조차 안했는데.
과거 여행기 단종(노산군) 과 정순왕후 송씨 사릉 여행기를 작성하면서 다시 가봐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바로 단종(노산군)이 영월로 유배로 유배가는 길에 지났던 다리입니다.
오랜만에 다시 찾아봤습니다.
조선 최장의 다리 살곶이다리(보물 제1738호)

보물 제1738호. 조선시대의 수도인 한양과 동남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로 사용되던 다리로, 원래의 이름은 제반교(濟盤橋)였다.

살곶이 다리를 지나 유릉으로 향하는 순종의 국장행렬.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연구자문위원인 이혜원 선생 소장 '순종 국장 사진

세종 2년(1420)에 가교 공사를 시작하였다가 성종 14년(1483)에 완성되었다.
다리의 규모는 길이가 75.75미터, 폭이 6미터로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나지막하고 난간도 없이 초라하게 보이나 조선시대에는 가장 기 다리였다. '
용재총화' 에 의하면 성종 14년에 "스님이 살곶이다리를 놓으니 그 탄탄함이 반석같다 하여 성종이 제반교라 어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횡렬 4, 동렬로 22로 중앙이 약 20센티미터 높게 곡면을 이루고 있으며, 독립 기초 위에 지대한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받침돌을 올린 다음 긴 멍엣돌을 깔아 그 위에 3줄로 판석을 붙여 깔았다.


교각 4개중 가운데 2개의 교각을 15 내지 40센티미터 가량 낮게 만들어 이 다리의 중량이 안으로 쏠리게 하여 다리의 안정을 꾀하려 했다는 점이다.



살곶이 다리는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다리일 뿐 아니라
세종 대에 유명한 건축가인 박자청(朴子靑)과 유연현(柳延顯)의 감독에 의해 세워졌다고 합니다.
고종 대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이 다리의 석재를 이용했기 때문에 다리의 일부가 손상되었다고 하며,
1913년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상판에 콘크리트가 덮여지고,
1920년에는 집중호우에 의해 다리의 일부가 떠내려가 방치된 것을 1971년에 보수·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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